고 김수환(스테파노) 추기경은 한국현대사의 고비마다 단호히 불의에 맞선 인물이었다. 1971년 예수성탄대축일 때 박정희 정권의 장기집권 의도를 처음으로 공개 비판했고, 72년 8·3 긴급조치, 10월 유신 때도 시국성명을 발표해 박 정권에 맞섰다. 74년 지학순 주교에 이어 76년 명동 3·1절 기도회 등으로 사제들이 잇따라 구속되자 성명과 강론을 통해 부당함을 지적하고, 민주 회복을 요구했다. 80년 5·18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김 추기경의 울분은 극에 달했다. 김 추기경은 당시의 일을 회고록에서 이렇게 털어놓았다.
“광주 시민들의 민주화 열망은 계엄군과 공수부대의 무력 진압에 의해 처참하게 짓밟혔다. 6·25사변 이후 최대 민족적 비극으로 막을 내렸다. 참으로 비통했다. 신군부 만행에 울분을 느꼈다. 난 본의 아니게 1970~1980년대 민주화운동의 한가운데 있었다. 그 20여년 중에서 가장 괴롭고 고통스러웠던 순간을 꼽으라면 주저하지 않고 ‘광주의 5월’이라고 말한다. 광주에 내려가 시민들과 함께 피를 흘리며 싸웠더라면 그토록 괴롭지는 않았을 것이다.”
1987년 1월14일 민주화 운동의 도화선에 불을 댕기는 사건이 터졌다. 서울대생 박종철군이 고문을 받다 숨진 것이다. 경찰에선 “심문 도중 책상을 ‘탁’하고 치니까 ‘억’하고 죽었다”고 발표했다. 김 추기경은 1월26일 봉헌된 박군 추모미사 강론에서 정권의 야만성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이 정권에 ‘하느님이 두렵지도 않느냐’라고 묻고 싶습니다. 이 정권의 뿌리에 양심과 도덕이라는 게 있습니까. 총칼의 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김 추기경의 추모미사로 촉발된 박종철군 진상규명 촉구시위는 들불처럼 번져나갔고 마침내 6월 민주항쟁으로 타올랐다.
김 추기경은 시위대에게 “폭력은 폭력을 낳는다”면서 각목과 화염병을 버리라고 말했다. 다행히 시위대는 김 추기경의 말에 순순히 따라주었다. 이에 김 추기경은 자신과 명동성당이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학생들을 보호해 주어야겠다고 결심했다. 김 추기경은 경찰에도 최루탄을 쏘지 말 것을 요구, 관철시켰다.
엄혹한 군부독재 시절 김 추기경은 최고 권력자에게 일갈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몇 안 되는 인물 중 한 명이었다.
김영번기자 zerokim@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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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환 추기경을 보내기 위한... 추모 물결..당신은 살아있는 기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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