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울한 사연에 가슴은 피멍…실적 좋으니 "거래업체에 몸로비"
'불'끄는덴 '용각산'이…스캔들 터지면 '무색무취' 생활로 버텨
프랑스 철학자 시몬느 드 보부아르가 말했던가. "우리는 귓속말로 들은 것을 가장 쉽게 믿는다"고.귀에서 귀로 살금살금 퍼져 나가는 사내 루머.때론 광속(光速)보다 더 빨리 퍼져 나가 누군가의 뒤통수를 치고 마는 게 사내 루머다. 근거 없이 시작한 '카더라 통신'은 여러 김 과장과 이 대리의 입과 귀를 거치고 나면 '정설'로 굳어지곤 한다. 사내 루머에 휩쓸린 걸 뒤늦게 알고 해명에 나서보지만 이미 손쓸 새 없이 당하고 마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래서 김 과장,이 대리에겐 호환(虎患)이나 마마,전쟁보다 더 무서운 게 사내 루머다.
◆몸로비? 프락치? 너무 억울해!
사내 루머는 한 사람의 입지를 순간에 무너뜨릴 수 있다. 가장 치명적인 건 사생활을 둘러싼 은밀한 스캔들이다. '부적절한 관계'에 대한 소문은 진실이든 아니든 치명타가 되고 만다.
중견업체에서 일하던 이모씨(31 · 여)는 자신을 둘러싼 섬뜩한 소문 때문에 아예 업계를 떠나게 됐다. 이씨는 성격이 예민하다. 잘못된 것을 보면 참지 못한다. 따지기도 좋아하는 성격이다. 그러다보니 사내에 적이 많았다. 그중 한 명이 마음먹고 악성 루머를 퍼뜨렸다. "이씨가 일 욕심 때문에 거래업체들에 '몸로비'를 하고 다닌다"는 게 골자였다. "민망한 사진까지 찍혔다더라"는 내용도 추가됐다. 뒤늦게 루머를 들은 이씨가 해명에 나섰지만 백약이 무효였다.
사내 권력 관계에 잘못 휩쓸려도 순식간에 '묵사발'이 된다. 유독 사내 정치가 횡행하는 중소기업에서 묵묵히 일하던 김윤석 대리(33)도 그런 경우다. 그는 2년여 전 회사를 떠난 전 사장에게서 "함께 일하자"는 제의를 받았다. 김 대리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문제는 김 대리가 전 사장을 만나는 장면이 사내 누군가에게 포착되면서 발생했다. 몇몇 동료들은 이를 근거로 "김 대리가 전 사장의 '컴백'을 위한 '프락치' 노릇을 하고 있다"는 헛소문을 퍼뜨렸다. 현 사장에게 충성한다는 증표를 보이고 싶어 안달이 났던 사람들이다. 어제만 해도 함께 커피를 마시던 다른 동료들도 김 대리를 따돌렸다. 졸지에 왕따 신세로 전락한 김 대리는 "전 사장의 눈에 들 정도로 열심히 일한 게 화근이었다"며 헛웃음을 지었다.
◆김 과장이 '용각산'이 된 사연
사내 루머가 무서운 것은 확산 속도 때문이다. 한번 사내 루머에 혼쭐이 난 사람들은 나름대로의 처세술을 갖추게 됐다.
대기업에서 일하는 김진희 과장(35 · 여)의 별명은 '용각산'이다. 용각산은 미세한 분말 상태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흔들어도 소리가 나지 않는다'는 광고 카피로 유명했던 약.김 과장에게 이런 별명이 붙은 것은 자기 색깔이나 의견이 없기 때문이다.
김 과장이 처음부터 용각산이었던 건 아니다. 그는 명문대를 졸업했다. 업무 능력도 빼어나다. 한때 아나운서를 지망했을 정도로 미모와 언변도 출중하다. 어디에 가도 눈에 띄는 '낭중지추(囊中之錐)' 같은 존재였다. 그런 김 과장이 용각산이 된 사연은 첫 직장에서 사내 루머에 휘말리면서부터다.
김 과장은 첫 직장에서 회식이 끝난 뒤 사내 2인자로 통하던 전무의 차를 얻어 타고 집에 갔다. 집 방향이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딱 한 번'에 불과했다. 평소 김 과장을 질투하던 동료가 이를 목격했고,입소문을 내기 시작했다. 소문은 "전무가 오피스텔도 얻어줬다더라…,차도 새로 뽑아줬다더라…"는 살이 붙으면서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됐다. 김 과장은 막장 불륜드라마의 여주인공으로 전락했다.
전무가 진화에 나섰지만,김 과장이 치명상을 입은 뒤였다. 김 과장은 "그 사건 이후 튀는 사람이 되지 말고,좀 부족한 사람처럼 보이자고 결심하게 됐다"고 털어놨다.
◆근거 없는 소문도 대처하기 나름
근거 없는 사내 루머에 휩쓸릴 경우 대처하는 방법도 여러 가지다.
대기업 경영기획실에 근무하는 조희철 대리(32)는 사내 루머를 초기에 진화해 성공한 케이스다. 그가 루머에 휩쓸린 건 신입사원 연수 때.강사로 들어온 임원이 친한 친구 아버지였던 게 화근이었다. 조 대리는 교육이 끝난 뒤 곧바로 친구 아버지에게 인사를 했다. 친구 아버지도 조 대리를 알아보고 반색하며 이런저런 안부를 물었다.
이 광경을 포착한 몇몇 동기들이 "조희철은 모 임원의 힘 덕분에 뒷문으로 들어왔다"는 등의 뒷말을 하기 시작했다. 조 대리는 참지 않았다. 동기들과 선배들에게 적극적으로 억울함을 호소했다. 조 대리는 "아무런 힘도 없던 신입사원이어서 소문은 금방 사그라들었다"면서도 "지금 생각해도 식은땀이 흐른다"고 말했다.
증권사 애널리스트인 최만식 과장(37)의 사내 루머 돌파 전략은 '닥치고 버티기'다. 증권업계는 특성상 스카우트 제의가 많다. 잘나가는 최 과장도 해마다 이직설에 휘말린다. 작년에는 "A증권사에서 연봉 얼마를 제안받았다더라","B증권사 리서치 센터장과 인터뷰를 끝냈다더라"라는 근거 없는 소문이 나돌면서 곤란한 상황에 내몰렸다. 최 과장은 반응하지 않았다. 묵묵히 자리를 지키자 루머는 자연스럽게 근거 없는 것이 됐다.
◆사내 루머를 역이용한다?
사내 루머가 항상 악영향을 끼치는 것만은 아니다. 때론 도움이 되기도 한다. 금융회사에 다니는 김진모 과장(36)은 사내 루머를 잘 활용해 결혼한 케이스다. 3년 전 그는 같은 팀의 여자 선배를 짝사랑했다. 몇 번이나 거세게 대시했지만,선배는 열번 찍어도 안 넘어갈 나무처럼 도도했다. 참다 못한 김 과장은 사내 루머를 역이용하기로 했다. '김 과장과 여자 선배가 그렇고 그런 사이다더라'는 소문을 의도적으로 퍼뜨린 것.소문이 커지자 선배는 당황하며 적극 해명에 나섰다. 그렇지만 남녀간의 소문이 어찌 쉽게 수그러들던가. 김 과장은 소문에 힘입어 더욱 적극적으로 대시했고,결국 결혼에 골인했다.
중소기업에 다니는 임진수 대리(34)는 사내 루머를 잘 이용해 사내 입지를 다졌다. 그의 첫 발령지는 종합기획실 겸 비서실.자연스럽게 경영진을 자주 만났고,임원들끼리 오가는 이런저런 말도 들을 수 있었다. 이런 임대리를 다른 부서 상사들이 놔두지 않았다. 점심을 같이 하자며 인사 관련 소문들에 대한 경영진의 반응은 어떠냐고 물어왔다. 적당한 선에서만 얘기해줘도 상사들은 고마워했다.
임 대리는 그 후 밑바닥 인심과 경영진과의 연결고리를 자임했다. 사내 정서를 모아 경영진에게 전달하고,잘못된 루머에 대해서는 경영진의 입장을 알려주는 것도 나쁠 것 같지 않다는 판단에서다. 임 대리는 "사내에서 정보가 권력이라는 걸 느끼는 건 사실"이라면서도 "말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어떻게 구분할지 생각하느라 항상 아슬아슬한 기분"이라고 말했다.
이고운/이관우/이정호/김동윤/정인설 기자 ccat@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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